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6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종종 영웅적인 인물로도 묘사된다. 음악의 성인(聖人) 즉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했고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어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루트비히가 죽기 전에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일종의 음악적 부적으로 그의 손자 루트비히의 방에 걸려 있었다. 루트비히는 같은 궁정에서 테너로 고용되어 노래를 불렀으며 때때로 부업으로 건반악기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던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마그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현재 본의 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 세례를 받은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자신도 본인의 생일을 12월 16일로 여겨왔으나 직접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 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요한은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되어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형의 반대를 꺾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한 후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아버지 요한에게서 처음 음악을 배웠다. 흔히 어린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하며 요한을 가혹한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적는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알아차리고, 같은 궁정 동료 등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베토벤의 교육을 맡겼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된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가족의 후원자인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베토벤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엄격한 교육 방침 안에서 종종 울기도 했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가 침대에서 자고있던 베토벤을 건반 앞으로 끌고가는 일도 있었다. 베토벤이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 요한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 볼프강과 딸 나넬을 어릴 때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것을 보고,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일곱살의 베토벤이 여섯살의 "신동"으로 선전하기도 했다.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출판작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가 출판된다. 베토벤은 1782년부터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하다가 1784년부터 궁정 예배당에서 임금을 받는 직원으로 일했다. 1783년에 출판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ö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선제후"(Kurfürst)라는 부제로 불린다.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같은 해에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임금 약간을 지불하며 1784년 그를 두 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히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에 돈을 대주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베토벤은 이 시기 앞으로 도움이 될 될 여러 인연을 만들었다.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가문도 그 중 하난데, 그곳에서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이닝로부터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앞으로 평생 친구가 될 폰 브로이닝 가문의 약혼자인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도 이 시기 만났다. 폰 브로이닝 집안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던 차에 또다른 가정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 손님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이 본에서 사는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1785–90년에는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초기 출판물이 끌었던 미지근한 반응과 베토벤 가족의 지속적인 문제 때문일 수 있다.그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1795년 빈을 처음 방문한 동안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궁정에서 알콜중독의 결과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고, 가르치는 일과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가족의 수입에 더 기여했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 글루크, 파이시엘로의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인 요세프 라이하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작곡가, 플루티스트,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톤 라이하(Anton Reicha, 1770–1836)와도 친구가 되었다.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음)을 작곡하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일련의 변주곡에서 그의 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를 확인했다. 베토벤이 그의 첫 번째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마도 네페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1790년 본의 문학 협회는 선제후에 의해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으로 칸타타, WoO 87을 의뢰하고, 이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 황제 즉위 축하 기념으로 추가로 칸타타, WoO 88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이 두 황제 칸타타는 그 당시에 연주된 적이 없었으며 1880년대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 그리고 그의 음악이 고전주의의 전통과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양식의 예언자로 묘사될 때까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었다.
베토벤은 아마도 1790년 말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의 크리스마스 무렵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6] 그들은 1년 반 후인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본에서 다시 만났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곡(《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과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하이든에게 보여준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베토벤은 고데스베르크의 무도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그 당시 베토벤은 나이든 스승과 함께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
"당신은 오랫동안 좌절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빈으로 갈 것입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